서점 방문기 ⑥ 용인 생각을담는집


우리가 꿈꾸는 세상_생각을담는집

정란희 동화작가

일상에 쫓겨 살다가 수업이 있는 날이면 하던 일을 일제히 멈추고 숲속 책방에 모여드는 이들이 있다. 작가와 함께하는 행BOOK학교 3기가 진행 중인 생각을담는집에 가면 만날 수 있는 이들이다. 오순도순 모여 앉아 사람들의 마음을 풀어놓게 하는 건 김은의 작가와 어린이문학이었다.

생각을담는집은 처인구 원삼면 사암리에 있다. 수도권이라고 말하자니 논과 밭이 사방에 펼쳐진 접근이 쉽지 않은 곳이고, 지방이라 말하자니 엄연히 경기도 용인시에 소재한다. 300살이 된 보호수가 있어 아주 오래된 마을이라는 것도 눈길을 붙잡는다. 사암리의 역사를, 용인의 역사를, 더 나아가 우리의 역사를 300년 동안 지켜봤을 느티나무는 오늘도 푸르다.

비 오는 수요일, 책방에 도착하자 김은의 동화작가가 환한 얼굴로 맞아주었다. 이미 빔프로젝터 화면에는 이번 행BOOK학교 3기의 강의 제목인 ‘나의 이야기를 너에게 쓰다’도 띄워져 있었다. 알찬 수업을 위한 심리적 물리적 준비가 완료된 표정이다.

잠시 후, 프로그램 참여자 9명이 책방 문을 열고 들어왔다. 수업에 늦지 않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부산을 떨었을 이들에게서는 바람 소리가 났다. 이렇게 해야 자신만의 진지한 시간을 확보할 수 있고, 책을 읽을 수 있으며 일상 너머의 언어를 생각할 수 있다고 했다. 아울러 동화를 쓰면서 아이들의 입장을 이해하게 되었으며 마음이 순해지는 것 같다고, 조금은 쑥스러워하는 얼굴로 넌지시 말을 건넸다.

김은의 작가는 동화 수업 시간에 현덕의 작품 「실수」를 다루었다.

엄마의 심부름으로 한길 기름집에 가서 기름을 사 와야 와야 하는 주인공 노마가 ‘조심히 다녀오라’는 어머니의 말씀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깡충깡충 까치걸음으로 다녀오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며 기름병을 깨뜨리는 내용이다.

간결하고 교훈성이 짙은 이야기지만 독자는 읽자마자 노마의 마음 친구가 되어 버렸다. 노마와 함께 까치걸음으로 걷고,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기름병을 깨고 나서 비죽비죽 새어 나오는 울음을 함께 만들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심지어 서사 배경이 일제강점기인데다가 월북작가로 긴 세월 감춰졌던 현덕의 작품이지만 살아 있는 동심과 독특한 캐릭터, 가독성 높은 문장이 주는 힘이 작품과 독자 간의 거리를 순식간에 좁혀 놓았다.

동화란 이런 것이다. 순식간에 독자를 무장해제 시키고 생글거리며 웃게 한다. 특히 현덕처럼 가난하고 소외된 아이들에게 힘을 주는 작가라면 독자는 작가의 마음을 삽화보다 먼저 읽는다.

김은의 작가는 현덕의 작품을 통해 시대에 따라 달라진 작법을 설명했다. 고개를 크게 주억거리는 이들의 얼굴에서는 반짝반짝 빛이 났다.

-작품을 통해 무슨 말이 하고 싶은가?
-이야기꾼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동화의 주제가 왜 중요한가?

이야기가 깊어갈수록 수업 참여자들의 공책은 글자로 빼곡하다.

참여자들의 얼굴에서 과거 어느 날의 내 표정을 발견했다. 작가 지망생 시절, 낮에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저녁에는 내 아이들을 보살피고, 모두 잠든 깊은 밤에 나는 책을 읽고 동화를 쓰며 꿈을 꾸었다. 고단했지만 참 좋았다. 세상이 노동의 대가로 내게 건넨 물질적 풍요보다 세상에서 건져 올린 동화가 훨씬 값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동화가 내 삶의 밀도를 채워주리라 굳게 믿었던 것 같다. 절대적으로 수면은 늘 부족했고 피곤한 생활의 연속이었지만 동화가 내게 주는 에너지는 별책부록처럼 따로 존재했기에 힘든 시간을 잘 이겨내고 살아올 수 있었던 것 같다. 책방에서 어린이문학에 마음을 기울이는 이들에게 마음속으로 뜨거운 응원을 보냈다.

내가 얼핏 과거를 떠올리는 사이, 참여자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졌다. 합평 시간이었다. 공들여 쓴 작품을 서로가 일일이 분해하며 따져 묻는데 저토록 유쾌할 수 있다니 덩달아 나도 웃음이 났다.

참여자의 작품을 돌아가며 읽고 생각을 나누고 의견을 제시하며 하는 과정이 너무 다정해서 나중에 책방지기에게 슬쩍 물었다. 참여자들이 원래 알던 사이인지가 궁금해졌다. 책방지기는 참여자들 대부분이 프로그램을 통해 알게 된 사이라고 했다. 감탄이 절로 났다. 알고 보니 같은 동네 사는 이웃도 있지만, 심지어 시 경계와 도 경계를 넘어온 이들도 있다고 했다.

모두 한마음으로 어린이문학의 세계에 기쁘게 들어와 한껏 즐기고 있었다. 가끔 세상 속에서 자신을 이렇게 건져내는 것도 참 좋겠다.
비가 그쳤다. 맑게 갠 하늘이 초록 숲의 물기를 빨아들이는 사이, 나는 생각을담는집을 떠나와야 했다. 어린이문학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시끄럽고 사납고 복잡하기만 한 세상도 조금씩 정화되어 나중에는 참여자들이 꿈꾸는 세상처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나는 흐뭇한 마음으로 그들이 글로 그려내는 세상을 상상하며 성큼성큼 세상을 걸었다.

정란희

2000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당선.
저서로는 [우리 이모는 4학년], [무명천 할머니], [나비가 된 소녀들], [ 슈퍼보이가 되는 법] 등이 있다.

생각을담는집

북토크, 작가와의 만남, 클래식 콘서트 등 다양한 문화활동을 하는 시골책방.
용인시 지정 생활문화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