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점 방문기 ⑤ 삼척 연 책방


동화 같은 하루_연 책방

정우신 시인

강원도 삼척시에 자리한 연 책방으로 떠난다. 지역 서점으로 모니터링을 갈 땐 늘 설렌다. 그곳에는 어떤 풍경과 이야기가 일상을 꿰어내고 있을지, 어떤 사람들이 마을과 문화를 꾸려나가고 있을지 궁금하다. 소풍 가는 아이의 마음으로 잠을 설치다가 이른 새벽 출발한다.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강릉 IC를 거쳐 동해고속도로로 들어서자 해가 뜨기 시작한다. 해가 산 너머로부터 시작된 건가 하고 바라보고 있으면 바다로부터 다가오고 있다. 바다를 보고 있으면 해는 어느새 산 뒤에 숨어 있다. 빛으로 이루어진 얇은 천이 산과 바다 위에서 펄럭이는 듯하다. 아침 햇살이 물과 풀에 닿아 햇빛으로 변하고 있다. 안개로 이루어진 「무진기행」의 초입처럼 삼척의 작고 푸른 빛들은 묘하고 몽롱한 느낌을 풍긴다.

수업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하여 동네를 한 바퀴 산책한다. 사람은 잘 보이지 않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개들이 자유로워 보인다. 목줄 없이 돌아다니는 개를 오랜만에 본다. 개들은 삼삼오오 몰려다니며 골목을 누빈다. 도시에서 사라진 풍경들을 생각해본다. 골목에 모여 놀다가 다른 친구가 보고 싶으면 그 친구네 집 앞에 가서 ‘친구야 놀자’ 하던 한 시절의 장면이 떠오른다. 요즘 아이들은 함께 놀 공간도 제약되어 있고 부모의 허락이 없이 무언가를 같이 하기도 어려워졌다. 아이들은 있는 그대로 사랑받고 존중받아야 하는데, 부모들이 스스로 계급을 나눠 아이들의 생활에 개입한다. 도시의 규칙에 갇힌 아이들을 보면 애잔하다. 서점으로 돌아와 동화책 몇 권을 훑어본다. 어디선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유난히 웃음소리가 독특하던 한 아이가 생각난다.

수업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하여 동네를 한 바퀴 산책한다.

서점으로 수강생이 들어온다. 한 명 한 명 들어올 때마다 웃음소리가 쌓인다. 각자 조금씩 준비해온 다과를 테이블 위에 꺼낸다. 무화과 마들렌과 오렌지, 그리고 예쁜 찻잔에 담긴 차가 동화의 시간을 당긴다. 좋은 분위기에 취해 사진을 찍고 있을 때 수강생 중 한 명이 ‘우리는 원래 이렇게 먹어요’라고 한다. 따듯한 웃음이 다시 서점을 돈다. 서점을 모두 둘러보기도 전에 수강생들은 ‘우리 서점 너무 예쁘죠?’라고 말한다. 이쯤 되면 누가 대표고 누가 손님인지 혼란스러운 상황에 놓이게 된다. 연 책방을 오고 가는 사람들이 평소에 얼마나 이곳을 사랑하는지 단번에 느껴진다. 지역 서점이 사랑방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인구 6만여 명의 삼척에서 연 책방은 더욱 특별해 보인다. 이런 동료들이 있다면 뭐든 열심히 읽고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행북학교 3기 수업이 끝나더라도 수강생들은 지금처럼 연 책방에 모여 서로의 인생을 응원해줄 듯하다.

각자 써온 동화 작품을 합평하는 것으로 수업이 시작되었다. 수강생들은 돌아가면서 서로의 작품을 읽고 평했다. 합평 시간이다. 자기 작품을 읽고 난 뒤의 얼마 동안의 침묵, 그 침묵의 시간은 정말 길다. 뭔가 다 까발려진 듯한 기분이 든다. 지난밤에 쓸 땐 정말 괜찮은 작품 같았으나 여러 사람이 있는 곳에서 소리 내어 읽으니 정말 별로인 느낌, 숨을 구멍이 있다면 당장 들어가고 싶은 그 감정이 떠오른다. 그런데 이 모임에선 그런 느낌이 약했다. 시가 아닌 동화라는 장르적 특성일까. 혹은 ‘우리 아이들에게 들려’준다는 독자 설정이 있어서 그런 걸까. 합평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배운다.

이런 동료들이 있다면 뭐든 열심히 읽고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작품을 낭독한 뒤 수강생들은 소재에 어떻게 착안하게 되었는지, 작품의 구상을 어떻게 하였는지, 창작 과정에서 발생한 에피소드 등을 자유롭게 이야기하였다. 서로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진심 어린 조언을 듣고 나니 작품이 새롭게 인식된다. 수강생들이 작품의 수정을 거쳐 행북학교 3기 창작집에 제출할 작품들이 벌써 기대된다. 동화책을 읽으며 동화의 시간에 대해 상상해본 적은 있지만 동화를 창작하는 시간에 들어와 누군가와 함께 동화의 시간을 보낸 적은 없다. 수업을 듣고 있으니 이미 나는 동화 속에 들어온 듯하다. 특히 ‘잔소리 감옥’, ‘잔소리 내비게이션’, ‘아이고 귀가 찢어졌네’, ‘잘못 상자’ 등의 작품을 경유하며, 동화의 시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이야기는 우리를 동화 속 주인공으로 보이게 하거나 우리가 살았던 시간을 환기시킨다. 서로의 글에 공감하는 수강생들의 모습에서 앞으로 그 글을 읽으며 울거나 웃을 아이들의 표정이 떠오른다. 동화는 과거와 미래가 함께 놓여있는 듯하다.

수강생들의 평가 이후에 강사는 작품에서 ‘세계의 구축이 필요하다’, ‘세계를 단단하게 만들고 단어도 더 긍정적이고 가볍게’ 쓰는 편이 좋다고 일러주었다. 주인공의 행동이 어떠해야 더 나은지, 교훈적이고 사회적인 내용을 작품에 어떻게 녹여내어야 좋을지, 작품에 나타난 ‘마음’들을 어떻게 풀어주면 좋을지, 작품의 형식이나 구성의 기본은 무엇인지 등을 설명하였다. 이어지는 수업에서는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을 자유롭게’ 써보는 시간을 가졌다. 수강생들은 금세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수강생들의 메모지나 노트북 위로 활자들이 튀어 오른다. 어린 시절 밖에서 누군가 부르면 밥도 먹지 않고 달려 나갔던 신발들처럼.

동화는 어쩌면 나만의 타임머신을 만드는 일인 듯하다. 시간과 공간도 승객과 인원도 내가 내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타임머신. 그것은 상상과 경험으로 누구든 만들어낼 수 있지만 누구든지 할 수는 없는 것 같다. 수강생들의 글은 자신의 아이나 조카를 어디로 이동시켜줄까. 그곳의 공기는 어떨까. 무엇이 살고 있을까. 내가 이 세상에 없을 때 아이는 내가 살았던 곳을 걸으며 어떤 생각을 할까. 나는 영화 <베테랑>의 한 장면처럼 아빠가 사장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맞는 장면이 떠오른다. 때론 망각과 왜곡이 편할 때가 있다. 지속되어야 할 이야기와 계속되는 이야기의 차이를 생각해본다. 생활. 이 두 글자는 산과 바다처럼 너무나 크다. 나는 여기저기 두루 깔린 햇살을 걷어내며 다시 삼척을 빠져나온다.

정우신

시집 『비금속 소년』, 『홍콩 정원』, 『내가 가진 산책길을 다 줄게』가 있다.

연 책방

강원도 삼척에 있는 연 책방은 책을 좋아하는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열려 있는 문화공간입니다. 책을 읽는 것은 결국 ‘나’에 대해 더 잘 알아가는 과정임과 동시에 ‘타인’과 ‘세상’을 이해함으로 좀 더 괜찮은 사람으로 살아가게 된다고 믿기에 다양한 책 읽기 모임을 제안하고 있으며 동네주민 누구나 자기가 좋아하는 책 한 권을 소개할 수 있는 코너인 ’50인의 책방’ 을 대표 프로그램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