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점 방문기 ⑩ 칠곡 그니여비그림책놀이터


동시가 세상을 바꾸는 방식 -그니여비그림책놀이터

정란희 동화작가


 
    
“동시가 세상을 바꾸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동시를 배우는 사람들은 스스로 달라지려고 노력하지요.
어쩌면 그게 동시가 세상을 바꾸는 방식일지도 모릅니다.”

 
 

박혜선 작가는 내게 말했다.

그니여비그림책놀이터의 문을 열면 파란색 표지의 그림책들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다. 빨간 동백꽃과 여러 색깔의 우산 모양 소품들이 매달린 예쁜 공간이다. 벽과 선반에는 그림책 주인공 아이, 수선화, 돼지, 개미, 박쥐 그림들이 편하게 기대고 있다.

그곳에서 박혜선 작가는 7명의 프로그램 참여자들과 함께 동시와 삶을 이야기했다.

“동시에는 사라진 시간을 다시 불러오는 마법이 있습니다.”

동시를 쓰는 7명의 어른들은 아이의 시선으로 세상을 다시 바라본다. 동심으로 세상을 느낀다. 어쩌면 성인들이 동시를 배우는 건 사라진 시간, 그 속에 사는 자신과의 교신인지도 모르겠다.

칠곡에서 유일한 그림책 전문서점인 그니여비그림책놀이터 책꽂이에는 우리나라 현대 그림책의 역사 30년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1990년대에 국내에 소개된 외국 그림책에서부터 최근 해외에 수출하고 교류하는 우리 그림책까지 다양했다. 작가들의 세계가 오롯이 담긴 그림책뿐만 아니라 그림책에 대한 이론서까지 빼곡했다. 그림책에 대한 책방지기의 사랑과 섬세한 관심을 느낄 수 있었다.

여기에 더 흥을 돋우는 프로그램은 행BOOK학교 3기의 강의 제목 ‘나의 이야기를 너에게 쓰다’이다. 35도를 웃도는 무더운 날에 세 번째 수업이 있었다. 동시들을 나누는 참여자들에게서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한 분이 식빵과 살구잼을 만들어 와 즐거움은 배가 된 듯했다.

책방 이름도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렸다. 그니여비그림책놀이터라니. 순우리말인가 싶은 책방 이름에는 반전이 숨어 있었다. 근이 엽이, 책방지기 아이들의 이름 끝 글자를 소리 나는 대로 쓴 말이란다. 다시 말해 그니여비그림책놀이터에는 그림책의 역사뿐 아니라 책방지기의 삶도 깃들어있는 것이다.

칠곡은 내게도 특별한 곳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의 대화에서 빠지지 않던 고장이다. 우리 아버지는 농사만으로는 8남매를 키우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평생 이동양봉을 하셨다. 2월 중순에 벌통을 차에 싣고 집을 떠난 아버지가 제주 서귀포를 들러, 5월 초에 오는 곳이 그니여비그림책놀이터가 있는 칠곡군 석적읍이었다. 수입의 70퍼센트 이상은 아까시꿀이었기에 개화 시기가 되면 우리 8남매는 두 손을 모으고 기도했다. 부디 비가 내려 꽃이 빨리 지지 않기를. 아까시 꽃봉오리들이 우리 꿀벌들을 기다렸다가 한꺼번에 피길…. 어쩌다 우리의 소원이 이뤄진 해도 있었으나 얄궂은 장대비가 허구한 날 쏟아진 해도 있었다. 그럴 때면 고사리손을 모아 시작했던 기도가 어머니의 눈물로 끝이 났다. 나의 열 살은 그렇게 아까시꿀로 달콤하면서도 아릿했다. 근이, 엽이는 자신들의 이름이 깃든 그림책놀이터에서 어떤 달콤함과 아릿함을 쌓아가고 있을까 문득 궁금했다.

수업은 속도감 있게 진행되었다. 마치 4강 안에 작가가 가진 비법을 기어코 알려주고야 말겠다는 듯 작가의 말은 빠르고 밀도 있었으며, 참여자들은 메모하고 공감하느라 잠시도 한눈을 팔 새가 없었다.

– 무얼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쓸 것인가?
– 시에도 플롯이 있다.
– 동화의 한 장면을 동시로 바꿔보기


특히 동화를 동시로 바꿔보는 과정은 무척 신선했다. 주인공이 시련을 딛고 다시 일어서는 과정을 쓴 작품도 있었고, 주인공의 유쾌한 인사말을 자신의 생활로 끌어들인 작품도 있었다. 또한 주인공이 친구들을 초대하는 모습을 보고 진짜로 손님을 초대하고 싶은 마음을 담은 작품도 있었다. 동시가 원래 어린이를 위해 쓴 시인만큼 어린이에게 행복과 사랑을 선물하고 싶은 마음이 짙게 배어 있었다.

지난 시간 작가가 참여자들에게 내어준 과제를 살펴보는 시간에는 깊은 공감은 물론 칭찬이 이어졌다. 열흘을 고민했지만 안 되더니 어느 순간 동시가 써지더라는 분, 거실에 앉아 있다가 무심코 눈에 들어온 식물들을 보고 썼다는 분, 새벽 3시까지 동시를 썼다는 분들의 말은 하나같이 진정성 있는 고백들이었다. 참새의 지저귐, 포도밭 풍경, 나무 이야기,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비 오는 날에 있었던 일 등에 작가는 귀 기울였으며 참여자들은 강한 창작 의지를 보였다.

수업을 마치자 프로그램 참여자들에게 동시 수업을 들은 뒤 달라진 것들이 있는지 넌지시 물었다. 자녀의 입장을 먼저 살피게 되었다는 분도 있었고, 자녀와의 소통에 큰 도움이 되었다는 분, 동시를 가볍게 생각했는데 만만치 않았다는 분, 학창 시절 학교에서 배우던 시와 다른 독특한 맛을 알게 되었다는 분도 있었다. 누군가의 삶이 바뀐다는 건 하나의 우주가 바뀌는 일이다. 그들은 스스로 달라지려 노력하면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바꾸고 있었다.

헤어져야 할 시간, 그니여비그림책놀이터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무더위에 행인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돌렸더니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경마산이 있었다. 나의 유년기에 나의 아버지가 꿀벌들과 함께 생활했을 산이었다.

책방 앞 너른 밭에 하얀 참깨꽃이 가득했다. 참깨꽃 봉우리에 고개를 들이밀며 분주한 벌들을 들여다보는데, 어린 막내딸에게 양봉 잡지와 농민신문을 읽어주던 그 시절의 아버지가 생각났다. 동시는 내게도 사라진 시간을 다시 불러와 주었나 보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얼굴을 때리는 지열보다 더 뜨겁게 내 마음에 사무쳤다.

정란희

2000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당선.
저서로는 [우리 이모는 4학년], [무명천 할머니], [나비가 된 소녀들], [ 슈퍼보이가 되는 법] 등이 있다.

그니여비그림책놀이터

꿈이 자라는 아이, 길을 열어주는 엄마, 함께 놀아주는 아빠.
칠곡군의 유일한 그림책 전문서점으로서 책만 파는 가게보다는 동네의 문화 사랑방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서점이 되고자 노력합니다. 양질의 그림책을 소개함은 물론 어른들 그림책 모임과 아이들 책놀이수업도 진행하면서 일반도서도 함께 판매할 수 있도록 준비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