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 고요서사 – 작가와 함께하는 행BOOK학교 2기(소설 쓰기 반 | 김수온 소설가)


해방촌 언덕을 오르면 – 김수온

작가와 함께하는 행북학교 2기 후기 | 소설 쓰기 반 | 서점 고요서사 | 강사 : 김수온 소설가

해 질 무렵, 해방촌의 어느 조용한 언덕을 오르다 보면 빛이 새어 나오는 창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커다란 창 너머 책장에 책이 가득 꽂혀 있는 그곳은 한번 본 사람은 쉽게 잊을 수 없는 풍경을 담고 있다. 골목을 지나는 사람들은 잠시 그 앞에 멈춰 서기도 하고, 동네를 떠도는 고양이들은 동그란 눈을 빛내며 창을 올려다보기도 한다. 나 또한 그랬으니까. 처음 찾아간 곳이었지만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바로, 따뜻한 빛으로 가득 찬 고요서사였다.

고요서사는 해방촌 언덕에 있는 작은 서점이다. 거긴 아마 살면서 내가 가본 서점 중에 가장 작고 아늑한 곳이 아닐까. 어린 시절 나는 친구들과 이불을 뒤집어씌운 책상 밑에 들어가 노는 걸 참 좋아했는데, 고요서사에 가면 이상하게 그 시절로 되돌아간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바깥에서 어떤 일이 벌어져도 이곳에서만큼은 우리의 놀이가 안전하게 지속될 것만 같은 그런 기분 말이다. 어쩌면 고요서사에 와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몹시도 작은 이 공간에서 마음의 평온을 느꼈을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창밖으로 보이는 언덕을 바삐 걸어갈 때, 고요서사 안에서는 그저 한가롭게 책을 고르고 펼치는 것이 전부다.

고요서사는 해방촌 언덕에 있는 작은 서점이다

올여름을 나는 고요서사와 함께했다. 유난히도 덥고 폭우가 잦은 여름이었다. 장마가 끝나고도 서울에는 많은 비가 내렸고 서점에 가는 날도 예외는 아니었다. 고요서사에 가는 매주 수요일마다 비가 내렸고, 나는 큰 우산을 챙기고 장화까지 신고서 집을 나섰다. 쏟아지는 비를 뚫고 가다 멀리 서점 간판이 보이면 오늘도 무사히 서점에 도착했다는 안도감에 괜히 가슴이 벅차오르곤 했다.

그런 궂은 날씨에도 서점을 찾은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소설 창작 수업을 들으러 온 수강생들 또한 하나둘 우산을 접고 서점 안으로 들어섰다. 비에 젖은 채로 서로의 얼굴을 마주할 때의 그 기분이란. 그즈음 서울에서는 기록적인 폭우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집을 잃거나 다치고, 목숨을 잃었다. 시장이 빗물에 잠겨 상인들이 피해를 입었고, 반지하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발달장애인 가족이 숨진 채 발견되기도 했다. 모두 우리 주변의 일이었다. 수업이 있던 날에도 뉴스에 폭우 피해를 담은 기사가 끝없이 오르내렸다.
오늘도 우리가 무사하다고.

언제나처럼 우리는 고요서사에서 만났다. 창 너머로 쏟아지는 비를 보며 아직 도착하지 않은 이를 조용히 기다렸고, 수업을 마치고 돌아갈 때는 서로의 안녕을 빌었다. 다음에도 무사히 만나자고.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 몇 차례의 수업이 지나며 나는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서점에 찾았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이 계절을 함께 견디기 위해. 그런 날들이 겹쳐지면서 우리의 여름은 조금씩 단단해져 갔다.

소설로 만난 서로의 모습은 서로 전혀 달랐지만, 그런 의미에서 그들이 몹시 닮아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고요서사에 둘러앉아 소설을 읽고 썼다. 첫 수업에서는 각자가 살아온 삶과 그 속에서 소설이 어떤 의미인지 이야기했다. 언제 어떻게 소설을 쓰기 시작했고, 지금 어떤 소설을 쓰고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또한 미래에는 어떤 소설을 쓰고 싶은지 함께 고민하며 가깝고도 먼 시간을 훌쩍 넘나들기도 했다. 소설은 그들의 삶에서 크고 작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소설로 만난 서로의 모습은 서로 전혀 달랐지만, 그런 의미에서 그들이 몹시 닮아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었다.

하루는 모두가 좋아하는 소설을 함께 읽어보기도 했다. 소설 수업을 수강한 수강생들은 각자 취향이 달랐는데, 누군가는 남녀가 사랑에 빠지는 로맨스 소설을 좋아했고 또 누군가는 외국의 유명한 고전 소설을 좋아했다. 그런 그들이 모두 같이 좋아하는 소설도 있었다. 이미 나는 여러 번 읽은 작품이었지만, 수업을 위해 다시 읽다 보니 이전까지는 특별히 눈여겨보지 않았던 장면이나 인물이 새롭게 보였다. 그건 수강생들도 마찬가지였는데, 누군가는 예전에 읽었을 때 마음이 아팠던 장면이 다시 봐도 여전히 그렇게 읽힌다고 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예전에는 이해되지 않던 인물이 이제는 어느 정도 이해되기도 한다고 했다. 어떤 인물에게 공감이 가는지, 어떤 장면이 가장 좋았고 그 이유는 무엇인지, 화자가 하는 행동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등 우리는 각자의 감상을 자유롭게 이야기했다. 하나의 소설을 읽으면서도 전혀 다른 감상을 풀어내는 것을 보며 각기 다른 사람들이 모여 소설을 읽고 쓰는 이 순간이 몹시 즐겁기도 했다. 

소설을 완성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각자 달랐다

우리는 9주간의 수업에서 단편 소설을 한 편씩 완성했다. 소설을 완성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각자 달랐다. 이틀 만에 소설을 써내는 사람도 있었고, 이주 넘게 소설을 붙잡고 있다가 마감이 되어서야 겨우 완성하는 사람도 있었다. 소설을 완성하면 차례대로 돌아가며 서로의 소설을 읽고 합평했다. 함께 지내는 가족과의 크고 작은 불화나 지속되는 전염병으로 인해 변해버린 일상 등 소재는 다양했다. 사실 그런 소재들은 우리 모두의 일상에 맞닿아 있는 것이어서 소설 너머에 있는 자신의 삶을 자연스럽게 털어놓게 되기도 했다. 가족이나 친구 등, 가까운 사람에게도 선뜻하지 못하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 쓰기 시작한 소설 속에서 다름 아닌 나를 이해하게 되거나, 나도 모르던 나의 감정을 발견하게 되기도 했다. 소설을 써 본 적은 있었지만 제대로 완성한 적은 처음이라고 한 어느 수강생의 말을 듣고서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나의 첫 소설은 무엇이었을까.

학창 시절의 나는 주말이면 구립도서관 구석에 앉아 무슨 뜻인지도 모를 어려운 책을 골라 읽고, 공책에 말도 안 되는 소설을 쓰고서 혼자 몰래 감탄하곤 했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순간에 나의 첫 소설이 내게도 있었겠지. 그날로부터 아주 멀어져 온 고요서사에서 나는 이들과 함께 소설을 읽고 쓰고 있다. 창밖 세상에서 어떤 일이 벌어져도 이곳에서만큼은 우리의 놀이가 안전하게 지속될 거라는 그런 믿음으로.

김수온

2018 한국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 『한 폭의 빛』 출간.

고요서사

서울 용산구 해방촌의 오래된 벽돌집들 사이에 숨어 있는 아주 작은 문학서점. 2015년 10월에 문을 열었습니다.
고르고 고른 소설·시·에세이로 서가의 중심을 채우는 ‘문학 중심 서점’을 지향하며 책을 혼자 읽고, 함께 읽고, 나눠 읽는 방법을 고민하고 시도하는 서점이 되고자 합니다.